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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O/스포츠

[스크랩] R.A. 디키

 이런 이야기는 항상 무언가 느낌을 주는게 정말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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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트라스버그, 우발도 히메네스, 맷 레이토스, 데이빗 프라이스.

올 시즌 초반 메이저리그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투수들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20대의 젊은 나이와 탁월한 신체조건, 무시무시한 강속구를 자랑한다. 투수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축복을 한 몸에 지닌 선수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들과는 정반대로 최악의 조건은 죄다 갖춘 투수도 있다. 뉴욕 메츠 투수 R.A. 디키가 그렇다. 선수로서 퇴물 취급을 받는 36세(1974년생)의 나이, 팔꿈치에 인대가 없는 치명적인 신체적 결함, 80마일 중반대의 형편없이 느린 볼 스피드. 거의 투수로서는 ‘저주’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디키는 앞의 20대 에이스들 못지 않은 놀라운 성적을 거두고 있다. 7경기 선발로 등판해서 방어율 2.33에 6승 무패(최근 6연승). 7이닝 4실점한 5월 30일 밀워키전을 제외하면 전부 퀄리티스타트(6이닝 3실점 이하)를 기록 중이다. 그가 빅리그 통산 28승(지난해까지 22승)에 그친 ‘평범한 투수’였다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성적이다.

과연 디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시련이 찾아오다

테네시 대학 시절만 해도 디키는 잘 나가는 강속구 투수였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선발된 그는 크리스 벤슨, 빌리 코치, 세스 그레이싱어, 브래든 루퍼 등 당대 최고 유망주들과 함께 막강 선발진을 구성했다. 그해 <베이스볼 아메리카>의 올림픽 특집호 표지를 장식한 것도 이들 영건 5인방이었다.

하지만 잡지 사진 촬영이 불행의 씨앗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디키를 1라운드 지명한 텍사스의 팀 닥터는 <베이스볼 아메리카>의 사진을 보고 그의 팔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신체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디키의 오른팔 팔꿈치 인대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 이에 텍사스는 당초 약속한 81만 달러 계약을 취소하고 7만 5천 달러의 헐값 계약을 새로 제시했다.

디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그를 진료한 의사들은 “인대가 없으면 통증 때문에 문을 열거나 자동차 키를 돌리는 것조차 힘들 것”이라고 했다고. 이를 뻔히 아는 다른 팀들이 더 좋은 계약을 제시할 리는 만무했다. 결국 디키는 텍사스의 제시액을 받아들인다. 후일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심정을 “당첨된 복권을 잃어버린 기분”으로 묘사했다.

상당수의 전문가는 디키가 선수생활을 오래 계속하지 못할 것으로 전망했다. 텍사스 구단이 그와 계약한 것도 가능성이 있다고 봐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빗나갔다. 디키는 결코 부상을 당하거나 선수 생활을 일찍 끝내지 않았다. 오히려 매년 마이너리그를 한 단계씩 통과하며 2001년 데뷔 5년 만의 빅리그 입성에 성공했다.

그렇다고 성적이 뛰어났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텍사스 시절의 디키는 그저 그런 패전처리용 투수, 또는 땜빵용 선발 투수에 불과했다. 이 시기 메이저리그를 본 국내 팬이라면 박찬호 등판 경기에서 중간계투로 나와서 화끈한 불쇼를 선보이는 디키의 모습을 종종 구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텍사스 시절은 디키가 자신만의 ‘장기’를 발견하게 된 귀중한 시기이기도 했다. 먼저 다른 투수들과 달리 디키는 아무리 많은 이닝을 던지거나 매일 공을 던져도 전혀 팔에 무리가 가지 않았다. 인대가 없다는 결점이 오히려 장점이 된 것. 이에 텍사스는 그를 ‘100이닝 불펜투수’로 쏠쏠하게 활용했다. 한국프로야구에서나 볼 수 있는 ‘노예’가 탄생한 순간이다.

디키와 ‘국민노예’ 정현욱의 등판 기록 비교
디키(2003년) - 38경기(13선발) 116.2이닝 9승 8패 1세이브
정현욱(2008년) - 53경기(7선발) 127이닝 10승 4패

후일 디키를 영입한 빌 바바시 시애틀 단장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이닝을 던지면서 팀 마운드의 부담을 덜어줄 투수”로 그를 평가했다. “구원으로 나와서 4이닝을 던지고 다음날 바로 선발투수로 기용”해도 전혀 무리가 가지 않는다는 것. 디키도 같은 인터뷰에서 다른 투수들처럼 “인대가 찢어지고 통증이 생길 염려가 없다”면서, 자신은 “던진 뒤에도 팔이 빠른 시간 내에 정상으로 돌아간다”고 자랑했다.

또 디키는 이 시기 자신이 일반적으로는 구종을 분간하기 어려운 특이한 공을 던진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처음에 ‘스플리터’로 분류되던 이 공은 나중에는 ‘판별 불가’로 처리되다 결국에는 너클볼의 일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클볼을 던지고 있었던 것.

이에 디키는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너클볼 투수로 변신할 필요성을 느꼈고, 2005년부터 너클볼러 출신의 코치 찰리 휴와 함께 본격적인 너클볼 연마에 나섰다. 휴 코치는 디키의 ‘자연발생 너클볼’이 보다 정통에 가까운 형태가 되도록 도왔고, 디키는 그해 전체 투구 중 절반 가까운 49.2%를 너클볼로 구사하며 변신에 박차를 가했다.

물론 정통파 투수의 너클볼러 변신이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법은 없다. 디키도 마찬가지였다. 트리플 A 레벨에서는 새로 장착한 너클볼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했지만, 막상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서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미숙한 컨트롤(2008-2009년 9이닝당 볼넷 4개 이상 허용) 때문이기도 했지만, 너클볼치고는 스피드가 빠르고(평균 77마일) 직구와 비슷한 궤적을 보인다는 데 진짜 문제가 있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그의 너클볼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줄 만한 참을성 있는 팀이 없다는 것. 2006년 이후 그의 소속팀은 텍사스-밀워키-시애틀-미네소타로 지구와 리그를 넘나들며 해마다 계속 바뀌었다. 이에 어쩌다 빅리그 등판이라도 하게 되면 살아남기 위해 너클볼이 아닌 다른 구종들을 섞어 던져야 했고, 그만큼 너클볼 완성도 지체됐다. 지난해만 해도 너클볼 이외의 네 가지 구종이 전체 투구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5.6%로 전문 너클볼러라고 보기는 어려운 수준. 디키의 변신은 그대로 실패로 끝날 것처럼 보였다.

6년 만에 너클볼을 완성하다

올 시즌을 앞두고 디키는 뉴욕 메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트리플 A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팬과 전문가들은 디키 계약을 두고 ‘메츠 트리플 A 투수진을 채우기 위한 영입’으로 평가할 만큼 기대치는 높지 않았다. 메츠 선발진도 산타나-펠프리-메인-페레즈-니스의 5인 로테이션이 완성된 상태라 다른 투수가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던 게 사실.

하지만 반전이 시작됐다. 디키는 스프링캠프에서 인상적인 투구로 코칭스태프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트리플 A에서 8경기 60.2이닝 4승 2패 2.23의 평균자책으로 호투를 이어가며 기회를 기다렸다. 이어 메츠 선발진이 줄줄이 나가떨어지며(메인 어깨부상, 페레즈 무릎부상) 마침내 디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5월 19일 워싱턴전. 올시즌 첫 등판에서 디키는 6이닝을 5안타 2실점으로 틀어막는 깜짝 호투를 펼쳤다. 팀은 패했지만 다음 기회를 얻기에 충분한 투구 내용이었다. 이어 25일에는 막강 화력을 자랑하는 지구 라이벌 필리스를 상대로 6이닝 7삼진 무실점 역투를 펼치며 시즌 첫 승. 필리스 타자들은 춤추는 디키의 공에 시종 타이밍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디키의 호투는 계속됐다. 30일 밀워키전에서는 팀을 스윕당할 위기에서 구출하며 7이닝 4실점 승리. 이후 6월 세 차례 등판에서 플로리다, 볼티모어, 클리블랜드 등 비교적 약체 팀을 상대로 손쉬운 승리를 챙긴 디키는 23일에는 강타선을 자랑하는 디트로이트를 8이닝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팀을 3연패 위기에서 구하는 6승째를 거뒀다. 시즌 6전 전승. 퇴물투수가 신데렐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디키가 달라진 비결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지난해까지 디키의 너클볼 구사율은 전체 투구수 중 65% 전후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85마일대의 직구와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 등 전형적인 정통파 투수의 레퍼토리를 섞어 구사했다. 하지만 올 시즌 들어 디키는 다른 구종은 전혀 던지지 않고 철저하게 너클볼과 직구로만 승부하고 있다. 이에 너클볼 비율은 82.1%로 급등한 반면 빠른 볼의 구사율은 17.9%로 떨어진 상태다. 비로소 완전한 너클볼 전문 투수가 된 셈이다.

구종이 단순해진 대신 너클볼의 완성도는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작년까지 디키의 너클볼은 온전한 너클볼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움직임을 보였다. Pitch F/X 데이터를 보면 횡적으로 너클볼이 -2.9/-2.4(2008/2009년) 빠른 볼이 -9.3/-10로 나타났고, 종 방향으로도 너클볼 2.8/3.9에 빠른 볼 5.5/6으로 움직이는 폭만 크다 뿐이지 비슷한 궤적의 움직임을 나타냈다.

Pitch F/X 데이터에서는 공의 회전이 클수록 공에 가해지는 매그너스 효과가 커지면서 가로/세로축의 수치가 커지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위의 수치는 디키의 너클볼이 너클볼치고는 회전이 많고 변화가 평범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 너클볼치고는 빠른 편(73~5마일)인 것도 타자들로서는 공략을 쉽게 한 부분인 게 사실.

하지만 올해 들어 디키의 너클볼은 급격하게 향상된 모습이다. 같은 데이터에서 올 시즌 디키의 너클볼은 횡축으로는 0.8 종으로는 -0.4로 작년까지와는 정반대의 무브먼트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디키의 올 시즌 패스트볼이 횡으로 -9.1, 종으로 3.2의 무브먼트를 나타낸 것과 비교된다.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전혀 생각지도 않은 움직임을 보이는 디키의 너클볼에 타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게다가 직구와의 구속차가 8마일에 불과한 탓에 타자들의 혼란은 더욱 커진다).

또한 너클볼 구사율을 높이면서 불안했던 컨트롤도 크게 좋아졌다. 올 시즌 현재까지의 9이닝당 볼넷은 2.27개로 지난해 허용한 4.20개의 거의 절반 수준이다. 반면 탈삼진은 2008년 4.65-2009년 5.88개에서 올해는 6.80개로 점점 늘어나고 있다. 지난 11일 볼티모어전에서는 생애 최다인 한 경기 8개의 탈삼진을 잡아내기도 했다.

디키가 올 시즌 맹활약하는 또 하나의 비결은 아메리칸리그를 떠나 내셔널리그에서 뛰고 있다는 점이다. 팀 웨이크필드가 건재한 아메리칸리그와 달리, 내셔널리그에는 지난 몇 년간 전문 너클볼 투수가 드물었다. 타자들로서는 처음 보는 디키의 너클볼이 생소할 수밖에 없다.

지난 2008년, 메츠는 인터리그 시애틀전에서 디키를 상대로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다. 당시 디키는 메츠를 상대로 7이닝 동안 삼진 5개를 잡아내며 무실점 호투, 팀에 11-0의 대승을 안겼다. 메츠 타자들은 만만히 봤던 디키의 너클볼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당시의 경험은 올 시즌을 앞두고 메츠가 디키를 영입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알려졌다.

또 라이벌 팀인 필라델피아도 올 시즌 들어 팀 웨이크필드와 디키에게 잇단 완패를 당한 바 있다. NL 선발투수 중 유일한 너클볼러인 디키가 당분간 계속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물론 유의할 점은 디키의 최근 3승이 전부 아메리칸리그 팀을 상대로 따낸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돌풍이 단순히 NL 효과만이 아닌, 너클볼의 완성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

디키의 앞날은 어떨까. 전문가들은 그의 기록에 어느 정도 거품이 끼어있는 만큼, 남은 시즌 동안 성적이 약간은 하락할 것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완성단계에 접어든 그의 너클볼을 감안할 때 10승과 3점대 방어율은 무난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특히 이닝이터가 갈수록 희귀해지는 최근의 야구에서 기본적으로 6이닝 이상을 던질 수 있는 투수라는 점은 디키의 가치를 높여주는 부분. 다소 많은 나이도 ‘인대 없는 너클볼러’라는 점을 감안하면 40살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디키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너클볼러의 전성기는 대개 32살에서 40살 사이에 찾아온다”며 “너클볼을 계속 던지다 보면 그 나이대쯤 원숙한 경지에 접어드는 모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한 ‘원숙기’는 너클볼을 배운지 6년째 된 올해에 들어서야 디키 자신에게도 찾아온 모양이다. 한때 마운드에서 공을 던진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적처럼 여겨졌던 디키. 나이 서른 여섯에 뒤늦게 찾아온 그의 시대가 가능한 한 오래도록 이어지길 기원한다.

*이 글은 <뉴욕타임스> 기사와 팬그래프닷컴(fangraphs.com)의 데이터를 참조해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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